시인. 아무도 내게 시를 써보라고 권하지 않았기 때문에 시를 쓰는 사람이 되었다. 시집 읽는 걸 지독하게 좋아하다가, 순도 100퍼센트 내 마음에 드는 시를 직접 써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 생각을 했던 도서관은 지금 사라지고 없다. 그곳에 다시 가고 싶을 때마다, 나는 인파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바쁜 걸음들 속에서 혼자 정지한 듯한 시간이 좋다. 혼자가 아닌 곳에서 혼자가 되기 위하여, 어디론가 외출하고 어디론가 떠난다. 그곳에서, 좋은 시를 쓰고 싶다는 열망보다 내 마음에 드는 시를 쓰고 싶다는 소망을 꺼내놓는다. 소망을 자주 만나기 위해서 내겐 심심한 시간이 많이 필요하다. 노력하는 것을 싫어하지만, 심심하기 위해서라면 최선의 노력을 기울여왔다. 심심함이 윤기나는 고독이 되어갈 때 나는 씩씩해진다. 조금 더 심심해지고 조금 더 씩씩해지기 위하여, 오직 그렇게 되기 위하여 살아가고 있다.








나는 카메라를 들고 실내에서 바깥을 빼꼼히 내다보며 사진을 찍었다. 금세 사라지고 말 것들에 렌즈를 들이대며, 금세 사라지고 말 것들을 언제고 이렇게 부지런히 기록해두며 살아가고 싶다고 생각했다.







지난여름은 일본의 오키나와를 여행하며 보냈다. 석회암 돌계단과 돌담이 푸른 이끼를 두른 골목골목을 돌아다녔다. 구멍이 숭숭 뚫린 그 석회암은 원래 산호의 시체였다. 바닷속에 살던 산호 숲이 땅의 융기 때문에 지상으로 올라와 석회암이 된 것이다. 이 사실을 알려준 것은 과학이었지만, 이걸 과학하게 해준 것은 육지 위에 널려 있던 산호의 시체였다. 불가사의하고 기이한 어떤 증거는 억겁의 시간을 거슬러 올라갈 상상력을 작동하게 하고, 그래서 과학 없이도 이미 과학이 되곤 한다. 그러니까 나는 이렇게 표현할 수 있다. 지난여름, 오랜 세기 전의 바닷속을 나는 산책했다. 티베트의 남초 호수에서 짠맛을 느끼며, 오랜 세기 전의 바닷속에 서 있다고 표현해도 좋다. 히말라야의 산등성이에 올라서서, 인도 판과 유라시아 판이 충돌했던 엄청난 광음을 만나고 있다고 표현해도 좋다.
자연이 우리에게 건네준 증표들을 통해서 우리는 감히 엄두도 못 낼 엄청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갈 용기를 얻는다. 시간을 거슬러서 연결 불가능한 것을 연결하는 용기를 얻는 것이 곧 상상력인 셈이다.





버려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순간부터
나무는 가장 아름답게 불탄다

제 삶의 이유였던 것
제 몸의 전부였던 것
아낌없이 버리기로 결심하면서
나무는 생의 절정에 선다
#도종환 #단풍드는날







모든 경계에는 꽃이 핀다. #함민복 #꽃






버스가 기울 때마다 비스듬히 어깨에 닿곤 하는 기척을 이처럼 사랑해도 될는지 #유희경 #민






침묵은 무엇을 지키는 데에 쓰이기도 하지만 무엇을 행사하는 데에도 쓰인다. 침묵은 경청과 묵살이라는 두 극단을 모두 포함한다. 침묵이라는 것은 내가 행할 때는 가장 신중한 방패지만, 타자가 행할 때는 가장 뾰족한 창일 수 있다. 나의 침묵은 방배처럼 나를 보호해주지만, 너의 침묵은 뾰족한 창처럼 나를 찌를 수 있다. 나는 말보다는 침묵에 가까운 사람이지만 우선 말해볼 것이다.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너를 위해서. 그러므로 실은 우리를 위해서, 매사에, 빈번이, 계속해서.




타인에겐 무심과 배포의 소산인 듯 보이겠지만, 실은 무뚝뚝함은 소심과 서투름의 결합이다. 인간관계에서 오해와 손해을 부풀릴 수 있는 결함 중의 결함이다. 조금씩 조금씩 나아지고는 있지만, 세심한 배려와 살가운 표현에 능숙한 성격이 나는 언제나 부럽다. 좋은 마음을 전하려 어어, 하는 사이에 기회는 물 건너가고, 좋아하는 누군가를 만나러 나갔다가 아무 표현도 못하고 터덜터덜 집에 돌아오기가 일쑤다. 하고 싶은 유일한 말을 그래서 시에다 적고는 한다.





실패가 더 아름다울 수 있다는 걸 목격하기 위해서 우리는 시를 읽는다. #시옷의세계 #김소연







이것은 그저 소풍처럼 소소한 일상일 뿐이었다. 서로 다른 출발지에서 서로 다른 이유들로 모여든, 수천 명의 소풍 행렬. 장소를 찾아가는 소풍이 아니라 사람을 찾아가는 소풍. 우리가 찾아가는 그 사람, 김진숙은 누구일까. 우리는 그 사람을 우리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녀를 만나러 간다. 우리가 우리에게 가는 길이다. 내쫓기어 공중에서 위험을 무릅쓰고 사는 사람, 그에게서 우리는 우리를 본다. #시옷의세계 #김소연





비프광장에서 집회를 마치고 영도 다리 진입을 다시 시도하기 위해 우리는 행진을 했다. 경찰이 강경하게 길을 막고 물대포를 쏘아댔다. 우리는 뒤로 돌아 다급히 뛰었다. 내가 도망치는 사이에, 맨 앞에 있던 많은 사람들이 연행되기 시작했다. 도망치며 친구를 챙기려고 주변을 둘러볼 때였다. 그 순간, 사람들의 표정을 보았다. 모두가 잔뜩 겁에 질린 얼굴. 조금 전까지만 해도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고 구호를 외치며 흥겹던 얼굴들. 삽시간에 두려움에 떠는 얼굴로 변해 있었다. 나는 이 두려움의 얼굴이 우리의 본래 얼굴이라고 생각했다. 공포와 두려움, 이게 우리 삶의 진짜 얼굴임을 그때 나는 보고 말았다. 그때 우리는 공포와 두려움을 나눈 사이가 되고 말았다. 각자의 두려움을 서로 보여준 사이가 되었다. 그런 사이끼리는 맨 처음 이유가 다를지라도, 같은 희망을 공유하게 된다. 그 희망은 희망을 희망할 권리였다.
다시 비프광장으로 돌아와 배낭을 내려놓고 한숨 돌렸을 때, 이름도 모르는 사람들의 잠든 모습게 친밀감이 생기기 시작했다. 어둡고 싸늘한 새벽녘. 나란히 잠든 사람들, 깨어서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며 동그랗게 모인 사람들, 광장이 그냥 그대로 집이 되는 시간이었다. 우리는 식구와 같았다. 그곳이 어디든, 두려움의 맨얼굴을 아무렇지 않게 나누었던 사이. 그게 내 개인의 두려움이 아니라 우리의 두려움이라는 것을 알아챈 사이. #시옷의세계 #김소연







지금 여기, 우리가 하필 같이 있을 때, 우리가 같이 있는 이유가 만들어진다. 이유는 변한다. 세밀해지고 증식된다. 절망과 두려움은 이겨내는 게 아니라 밥처럼 마주 앉아 나누는 것이다. 나누는 사이로 희망이 끼어들어 이유를 완성한다. 희망을 싣고 달리기 때문에 희망버스가 아니었다. 달리다 보면 희망이 실리기 때문에 희망버스였다. 김진숙을 못 보고 돌아왔지만 소풍은 좋았다. 하나의 이유가 너무 많은 이유를 만나고 돌아왔다. 빈 도시락을 들고 갔다가 꽉 찬 도시락을 챙겨 들고 돌아온 소풍이었다.








허우적거림은 나의 자세를 헝클고 공기를 헝클지만, 나를 넘어지지 않게 하고 공기를 고여 있지 않게 합니다. 이렇게 허우적허우적하는 표현들을 가장 따뜻하게 받아주는 우리의 마지막 장소는 어쩌면 시의 장소일 거예요. 그러므로 시의 장소에서는 질서를 꿈꾸지 말아야죠. 허우적거려야죠. 혼돈을 혼돈으로, 불안을 불안으로, 공포를 공포로 말해야죠. 그렇게 해도 되는 마지막 장소니까요.





사람에게 말이 있어서 다행이라고? 천만에. 사람에게 말은 업보였다. 말은 빚어지은 동시에 깨졌다. 그게 사람의 운명이고, 사람인 한 그 멍에를 짊어지고 고해의 언덕을 힘겹게 걸어 올라가야 한다. 사람에게 말이라는 것은 쓸모 있거나 아니거나 간에, 그 자체로 이미 트라우마다. 인간은 어쩔 수 없이 말과 사물의 간격, 말과 사람의 간격 속에서 길을 잃는다.





안녕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밥그릇을 빼앗겨 내몰리고 죽음에까지 이르는 사람들의 소식이 귓전에 들려오는 이 세상에서, 나만 안녕하다는 사실에 안도하는 괴물은 아직 되지 않은 사람이다.



아, 이런 좋은 꿈들을 꾸다 보니 갇혀 있다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는다. 정리해고와 비정규직화는 어쩔 수 없다는 이 시대의 감옥에서, 모든 억압과 좌절의 감옥에서 더 많은 사람들이 나비처럼 훨훨 날아 나오는 꿈을 꿔본다.
- 송경동, 꿈꾸는 자 잡혀간다





감옥이 어디인지, 이제는 문학만이 제대로 말할 수 있다. 어쩔 수 없다는 좌절의 몽롱함이 아니라, 꿈꾸는 자의 악착같은 힘으로.






비는 별조차 뽀득뽀득 닦아놓았다.




솔방울 하나가 떨어져 있거나, 모양 좋은 낙엽이 떨어져 있을 때에는 허리를 굽혀 줍는다.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자세히 들여다보면, 떨어져 나뒹구는 무심한 사물 하나가 얼마나 아름다운 무늬를 지녔는지, 나는 늘 감탄한다.




우리가 잃어버린 세계는 꿈이 아니라 심심함의 세계이다. 심심함을 견디기 위한 기술이 많아질수록 잃어가는 것이 많아진다. 심심함은 물리치거나 견디는 게 아니다. 환대하거나 누려야 하는 것이다.







한 시대의 여물인 고통과 한 시대의 신발인 절망감, 한 시대의 비행과 한 시대의 불감증을 한 시대의 길가에서 우리는 사랑의 편지를 주웠지만 아무에게도 전하지 않는, 우리는 어쩌면 이미 사망했다.





영원히 사춘기로 살기 위해서 우리는 꿈을 종이비행기처럼 접어 날리고 잠 속으로 도망쳤다.





행복 같은 게 저 멀리 있는 듯하여 부지런히 그쪽으로 달려가야 할 것 같은 피로함. 저쪽으로 달려가다 매번 넘어져버리는 삶. 넘어져, 흰 셔츠 호주머니에 고이 넣어둔 버찌, 양손 가득 소중하게 들고 있던 토마토가 뭉개져버리는. 이번 가을은 호주머니가 비어 있었으면 한다. 양손 모두 허전한 채로 비어 있었으면 한다. 달려갈 곳도 없이 그냥 텅 비었으면 한다.







오늘 우리는 야외로 나와, 길고 널찍한 경사지에 선다.
검은 옷을 입은 사람도 있다. 햇빛 속에 서서 눈을 감으면,
서서히 앞으로 밀려가는 느낌을 가지리라.

나는 좀처럼 바다로 내려오지 않지만, 오늘 이곳
평화로운 등을 가진 큼직한 돌들과 자리를 함께 한다.
돌들은 바다로부터 한 걸음 한 걸음 뒷걸음질쳐 여기에 와 있다.
- 토마스 트란스트뢰메르, 느린 음악






시인으로 산다는 비참은 방식이 좀 다르다. 먹고사는게 비참해서 더 큰 비참을 외면하는 삶이 아니라, 더 큰 비참의 참담함 때문에 먹고사는 비참을 외면하게 되는 삶.




우리 눈은 지는 해와 뜨는 해을 보며 무어라 말할 수 없는 매혹적인 색을 착시해낸다. 산란하는 모든 것을 향한 우리의 황홀한 착시 때문에 우리는 늘, 불가피하게 빛의 모퉁이를 돌아서 집으로 간다.



길을 걸으며 이야기할 때가 좋다. 땅을 바라보는 척하면서 그의 그림자를 바라볼 수 있으니까. 그와 내가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걷는다는 사실을 그림자를 통해서 알 수 있으니까.






꿈이 사라진 자리에서 계획만 세우고 산다고.






네 눈에 비친 나를 나는 내 자신보다 더 좋아했던 것 같아. 네 눈에 비친 내가 되려고 어쩌면 여태껏 살았을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어. 오래된 친구는 오래 묵은 서로의 결핍을 사랑해주는 사이라고 생각해. 나는 너의 결핍을, 너는 나의 결핍을. 그러니까 나는 지금, 행복이 다녀간 자리에서 살아간다고 생각해. 너도 그렇지 않을까. 어쩌면 행복이 지금 막 다녀간 자리에서 우리는 매 순간 행복에 대해 생각하는 것은 아닐까. 어제 너를 만난 오늘처럼 말이야.




이번 크리스마스엔 내가 네게 노래를 선물할게. 그때 그 시절에 우리가 함께 듣던 노래들. 꿈을 끝내주게 높이 매달아놓아서 모든 게 눈이 시리듯 시리던 시절들에 듣던 노래들. 내용은 없이 형식만 채워가는 지금의 꿈하고는 차원이 다른 꿈이 담겼던 그 시절들의 노래들을. 그때 우린 정말 바보였지만, 나란히 앉아 같은 노래만 들어도 우주 한복판으로 진출한 듯 든든했지. 후회 같은 것, 체념 같은 것을 발가락으로 튕기며 유희했지. 꿈을 신발처럼 신고 있어서 참으로 씩씩했지. 내가 보낼 노래들이 타임머신이 되어, 가난했지만 높았던 시절로 너를 데려가주었으면 해.
나는 알고 있어. 살던 대로 계속 살아만 가도 충분히 훌륭한 너이지만, 엉뚱하고도 먼 꿈이 계속계속 너에게 찾아오고 있다는 거. 언젠가 우리가 또다시 만날 때엔 꿈에 대해서 사춘기처럼 얘기를 나누었으면 해. 예순이 되어도, 일흔이 되어도 유희처럼 꿈에 대해 말하고 싶어서 서로를 불러냈으면 해. 만날 때마다 우리, 꿈꾸던 대로 살라고 씩씩하게 서로 응원을 해주자. 아무리 뜬금없고 아무리 헤아릴 게 많아도. 그래서 씩씩한 뒷모습을 보이며 잘 가 인사하고 돌아서자.







2017년 8월 19일 시옷의 세계 - 김소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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