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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신과 영수증

아파쇼나토 2016. 3. 24. 16:37


그래 맞아
나도 초등학교 때 그 애와 절대 짝이 되기 싫었지
맨날 짝 바꿔 달라고 울었었지

그런데 졸업식 날 알게 된 건데
그 애가 나를 좋아했었대

쓰레기 봉투를 사와서 두 봉투에
이것과 저것을 나눠 담으면서

이것이 저것을 좋아하는지
저것이 이것을 좋아하는지

혹시
이미 사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수사 중이다

2001년 5월 21일 오후 8시 02분
강남 가정용 쓰레기 봉투
2800원
세븐일레븐






나와 내 친구를
새로 이사간 집에 초대하고
내가 일했던 가게에
초밥을 사다 준 일
힘든 세상 꿋꿋이 견뎌내라고 거친 글씨로 적어준 편지
차에서 들었던
MY FUNNY VALENTINE 이 노래
지금은 무슨 말인지 다 알겠는데

그땐 스무 살이어서

예전에 오빠가 좋아했던 여자 이야기
모두 다 못 알아 들었지







"엄마 나 왔어!"
하고 들어가니

가스레인지 위에서 식어가는 보리차가 말을 해주는데
엄마는 가까운 친구 집에 마실을 가신 것이라고
곧 돌아오실 거라고 한다
아마 멀리 가실 거였으면
플라스틱 주전자에 나를 따르고 냉장고에 넣어두고 가셨을 거라고






낙지덮밥의 아래층에 사는 것처럼
맵고 뜨거운 날씨야






혼자 살 때보다
지아랑 살면서 좋은 점은
밥을 먹을 때
젓가락으로
두 장 짚게 된 깻잎의

아랫잎을 붙잡아 준다는 것이다

나를 붙잡아 주는 지아와 함께







"오빠
오빠의 집에 다녀오니까
매일매일
오빠의 집에 가고 싶어요
그래서 하얀 우유가 되어 매일 아침 오빠의 집에 가려고요
아침에 일어나서 문 밖의 나를 집으로 데리고 가요"

"하하하 그래 좋아 고마워"

그 때
그렇게 매일 아침
하얀 서울우유를 배달 보냈지
그러다가 발렌타인데이 날에는 초코유유를 보내려고 생각했었어

그렇지만 그 오빠
이젠 어디에 사는 지도
우유빛 만큼 뿌옇지

오빠였었는대
왜 결혼해서 아저씨가 되었어
미워미워
미워

2001년 10월 21일 오후 1시 53분
서울우유 500ml
850원
세븐일레븐







1999년 나의 친구 사이다가
스물 두 살이었을 때
스물 한 살부터 모은 돈으로 니콘 FM2를 사고

충무로 던킨 도너츠 창가에 앉아서
나에게 묻는다

"정신, 나 잘 할 수 있을까?"

"그럼 잘 할 수 있지 걱정마"
그렇게
이렇게
스물 넷이 될 때까지
계속 할 수 있을 것을
미리 알고 있었던 가게 안의 도너츠 들은
다들

동그라미

글쎄어고 하는 세모난 것들은 팔려나가고 없었지

2001년 오늘 던킨 도너츠에 들러
시나몬과 바바리안 초코하니딥을 고르면서
며칠 후 수능시험을 준비하는 고3 수험생 같기만 한 여자아이 둘이서
창가에 시무룩하게 앉은 것을 보고
나는 저쪽에 두개 남은 세모난 것들을 모두 선더

5분 후

창가의 여자아이들이
환히 웃으면서
동그란 도너츠를 먹고 커피를 마신다

이들도 우리처럼 잘 할 수 있을 것이다

2001년 11월 9일 오후 4시 13분
도너츠와 휀시류
3800원
던킨 도너츠






강가엔
고전 건축물들이 주루룩 서 있다

건강하게 세월을 참아내어
이 건축물로부터 멀기만 한 나라와
멀기만 한 시대에서 온 나를 반겨주며

지난 역사를 모두 믿게 한다

2001년 12월 6일 오후 5시 19분
바게트
5.95F
S.O.G.E.S.T







맞아맞아

나는 학교다닐 때
탈색한 아이들의 머리카락과
그 머리카락을 신경질적으로 휘저어 대던
가정 선생님의 자주색 손톱이
서로를 이해할 수 있으면 좋을텐데 생각했어

우리 모두
색깔에 관심이 있어서 그러는 건데 하면서 말이야








'오늘은 이 만큼까지만 먹자
이거 다 먹으면 뚱땡이 코끼리 다리 되니까
나머지는 내일 아침에 먹자' 하고

의자를 딛고 올라가 높은 선반 위에 이 만큼 남은 빵을 올려 둔다

그렇지만
소용없는 일
샤워를 하고
의자를 딛고 올라가
높은 선반 위에 이 만큼 남은 빵을 내려 온다

하하하 이럴 거였으면
그냥 식탁 위에 놓아 둘 걸
뭐하러 의자를 딛고 올라가 그 높은 곳에 두었을까

오늘 아침에도 우리는 새상에서 제일 맛있는 빵을 한 봉지 산다
두 봉지 사고 싶은 마음을 슈퍼마켓 선반 위에 올려 두고서

2001년 12월 11일 오후 6시 28분
BRIOCHE TRAN
10.63F
GEANT PARIS MASSENA







저녁에 난로 불을 끄고 집에 갈 때엔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제 시험이 얼마 안 남았으니
느그들 괜히 새 문제집 사 들이지 말고
있는 거 다 풀고 다 푼 사란들은
또 보기라
공부 못하는 아이들이 새 문제집 사는 기라"

인천 공항에 도착하여
비행기 밖으로 나가는 길에

나는 선생님의 말씀을 다시 떠올리며

프삭프삭 웃으며

나의 친구, 나의 일, 사랑 그리고 어려운 문제들
다시 잘 보고 풀어내야지
새로 살 것 없어





생겨난 그대로 살아가기를 바랍니다.
생겨나게 해주신 하느님 감사합니다.




나는 정신을 2004년에 처음 만났다. 민선 언니의 소개로 나간 자리였다.
난생 처음보는 종류의 한 작은 애가 시작부터 영롱한 무엇이었다. 완전히 달랐다.

아홉 살에도 열네 살에도 스물셋에도 내가 찾던 사람.
그 나이엔 어디에 살았느냐고 처음 만난 자리에서 실제로 그런 질문을 막 해댔었다.
글리세린을 섞은 듯 쉽게 증발하지 않는 정신의 이야기들은
뒤틀어져 엉거주춤 힘겨운 숨을 내쉬던 나를 촉촉히 펴주었다.

그날부터 오늘까지 십이 년이 흘렀다. 서수남 하청일같이 사이좋게 쏘다녔다.
이제 나는 정말 더 찾지 않는다.
어떤 해는 정신을 한 번도 못 보고 지나가도
정신을 모르던 시덥잖은 날들에 비하면 아름답다.

정신과 영수증의 재출간을 축하하며

방송인 / 홍진경






20160324 정신과 영수증 - 글 정신 사진 사이이다 디자인 공민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