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요일의여행'에 해당하는 글들

  1. 2017.09.26  책: 모든 요일의 여행 - 김민철

행복을 향한 몸짓이 이토록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행위가 여행 말고 또 있을까.





'나는 여행을 좋아한다.'
이 말은 뻔하다. 굳이 종이를 낭비해가면서까지 쓸 필요는 없는 말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바꿔보면 어떨까.

'왜 나는 여행을 좋아하는가.'
갑자기 문장은 풍성해지기 시작한다. 다른 햇살이 스며든다. 공기의 질감까지 부드러워진다. 심장 어딘가가 간질간질해진다. 오후 다섯 시의 그 하늘을 이야기하고 싶어진다. 한낮 차가운 와인을 마신 듯한 기분이 되기도 한다. 낯선 골목이 노래로 가득 차기도 하고, 낯선 얼굴이 두둥실 떠오르기도 한다. 유난히 작았던 숙소가 문득 다정하게 느껴지기까지 한다. 비바람에 고립되었던 그 아찔했단 순간은 인생의 모험으로 포장된다. 폭포 앞에 서는 사람도, 골목 끝에 서는 사람도, 끝없는 시골길 위에 서는 사람도 일을 것이다. 지나간 연인의 얼굴이 겹쳐지는 사람도 있고, 유독 높았던 웃음소리가 덧입혀지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문장 하나 바꿨을 뿐인데 저마다의 여행은 저마다의 이야기로 빛나기 시작한다. 좀처럼 바래지 않는 빛들로 눈이 부실 지경이다.




각자의 여행엔 각자의 빛이 스며들 뿐이다. 그 모든 여행 끝에 내가 내린 결론이다. 분명 같은 곳으로 떠났는데 우리는 매번 다른 곳에 도착한다. 나의 파리와 너의 파리는 좀처럼 만나지지 않는다.






그러니 나는 나의 빛을 기록하고 싶었다. 무엇보다 그 빛은 나를 고스란히 드러내는 빛이었기에. 미처 몰랐던 취향이, 애써 외면했던 게으름이, 떨칠 수 없는 모범생적인 습관이, 난데없는 것에 폭발하곤 하는 성질머리가, 또 어지간한 것들은 무턱대고 긍정적으로 해석해버리는 단순함이 여행의 빛 아래에서 드러났다. '나는 이런 걸 좋아하는 사람이구나, 나는 이런 걸 못 견디는 사람이구나, 나는 이런 걸 위해서는 다른 모든 걸 포기해버릴 수도 있는 사람이구나, 나는 이런 걸 위해서는 다른 모든 걸 포기해버릴 수도 있는 사람이구나, 나는 저런 사람을 좋아하는구나' 등등 여행을 통해 나는 나에 대해 진지하게 배웠다. 여행이 내게 나를 말해주었다.





예전 책에
'여기서 행복할 것'
이라는 말을 써두었더니
누군가 나에게 일러주었다.

'여기서 행복할 것'의 줄임말이
'여행' 이라고.

나는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모든 행복은 우연히 마주치는 것이어서 그대가 길을 가다가 만나는 거지처럼 순간마다 그대 앞에 나타난다능 것을 어띠하여 깨닫지 못했단 말인가. 그대가 꿈꾸던 행복이 '그런 것'이 아니었다고 해서 그대의 행복은 사라져 버렸다고 생각한다면- 그리고 오직 그대의 원칙과 소망에 일치하는 행복만을 인정한다면 그대에게 불행이 있으리라. - 앙드레 지드, 지상의 양식






나는 이런 생각을 한다. 어떤 사람들은 자기가 태어날 곳이 아닌 데서 태어나기도 한다고. 그런 사람들은 비록 우연에 의해 엉뚱한 환경에 던져지긴 하였지만 늘 어딘지 모를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가지고 산다. - 윌리엄 서머셋 모옴, 달과 6펜스




내가 <달과 6펜스>의 주인공 스트릭랜드처럼 결단에 가득 찬 인물이었다거나, 혹은 결단을 늘 행동으로 옮기고야 마는 성공 수기들의 주인공이었다면 이야기는 달라졌을 것이다. 어쩌면 지금 이 글을 이탈리아 소도시에서 빨래를 널다 들어와서 쓰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어쩌면 브라질 오지를 탐험하면서 수첩에 이 글을 끄적이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지금 나는 일요일 오후에 겨우 빨래를 널고, 다음 날 출근을 괴로워하며 이 글을 쓰는 중이다. 나는 지극히 소심하고, 어설픈 확신 따위에 인생을 거는 치기를 가지고 태어나지 못했으므로. 나는 '만일'이라는 가정법에 인생을 송두리째 걸 수 있는 인간형이 아니므로. 스물한 살이 아니라 서른일곱 살쯤이 되고 나면 자기 자신에 대해 그 정도는 알게 된다. 동시에 결국 이곳이 나의 고향이라는 것도 알게 된다. 매일을 살아가는 이곳이 고향이 아니라면, 다른 곳에도 고향은 없다는 것을.





당신이 누구든, 얼마나 못났든, 당신이 보여주고 싶어하는 당신을 나는 사랑한다. 나는 당신이 들려주는 말들을 사랑한다. 그게 거짓투성이여도 상관없다. 당신이 보여주고 싶어하는 당신을, 나는 당신이라고 부르려 한다. 당신이 들려주는 말들을 당신의 진심이라고 여기려 한다. 왜냐하면, 당신이 믿고 싶어하는 것을, 내가 함께 믿고 싶기 때문이다. - 김소연, 시옷의 세계







나는 여행객. 너의 보석을 누구보다 소중히 여길 사람. 그 보석이 이 도시에서 가장 빛난 보석이라고 믿어버릴 사람. 김거이 믿어버릴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 나의 이름은 여행객. What's your favorite로 너의 진심을 알고 싶은 사람. What's your favorite에서 슬며시 드러나는 너의 진심에 내 여행 전부를 걸고 있는 사람. 무모한 사람. 아직도 진심을 믿는 순진한 사람. 나의 이름은 여행객.





좋아하는, 내가 좋아하는, 남들과 상관없이 내가 사랑하는, 바로 그것을 위해 여행을 떠나는 것.






완벽하다고 할 수 있는 방법은 없지, 그가 말했어요. 하지만 완젹한 건 그다지 매력이 없잖아. 우리가 사랑하는 건 결점들이지. - 존 버거, A가 X에게






"난 내일의 진리를 말하지."
"난 오늘의 과오 쪽이 더 마음에 들어요." - 오스카 와일드,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






같은 해가 이곳에도
뜨고
진다.

나는 넋을 잃고
풍경 저 끝네서 이 끝까지
카메라을 들고 뛰어다닌다.
마치 해 지는 걸 처음 본 사람처럼.

그곳과 이곳은 다른 해가 아닌데
그곳과 이곳에서의 내가 너무나도 달라
해도 달도 별도 다르게만 보인다.








살아오면서 그런 유의 행복을 종종 맛본 적이 있다. 여행 끝에 마시는 한 잔의 물. 소박한 은신처, 세상 어느 귀퉁이에서 남모르게 살아가는 인간의 따뜻하고 소모되지 않은 마음. 그 마음은 낯선 이를 기다린다. 그리고 마침내 가 길의 끝에서 낯선 이가 나타날 때, 인간을 발견한 그 마음은 기쁨으로 설렌다. 그리하여 마치 사랑에 빠진 것처럼 지극히 환대한다. - 니코스 카잔차키스, 지중해 기행






좋은 걸 보고 흥분할 때, 옆에서 같이 좋아해주는 사람이 있으니 좋았다. 미술관에서는 서로가 발견한 것들을 나누며, 각자가 알고 있는 것들을 합쳤다. 혼자 여행할 땐 '아, 이걸 그가 보면 정말 좋아했을 텐데......' 수없이 생각했는데, 같이 여행하니 그런 생각 자체가 사라졌다. 그냥 지금 같이 보며, 같이 좋아하면 된다는 건 참으로 간단한 행복 공식이었다.








함께한 7년의 여행이 준 선물 같았다. 아니, 명백한 선물이었다. 여행에서의 남편이 바뀌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아까 내가 한참 버스을 찾으러 뛰어다닐 때 남편도 주변 사람들에게 물어보고 있었다. 그 전에는 얌전히 나를 기다리던 사람이, 자기도 방법을 찾으려 하고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어느새 남편은 다음 여행을 말하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예전에 다녀온 곳을 이야기하면서 또 가고 싶다고 줄기차게 말하는 사람, 아무것도 없는 작은 도시를 나보다 더 좋아하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심지어, 변수 앞에서 나를 안심시키는 사람이 되어버린 것이다. 남편이. 나의 무능한 여행 짝꿍이. 더 이상은 결코 무능하다 말할 수 없는 여행 짝꿍이 된 것이다.





"저기가 유명하대"라고 말했더니 남편은 "누가 그래?"라고 물었다. "블로그에서 봤어"라고 대답했더니 남편은 "그 사람이 이 도시의 모든 식당을 다 가보고 말하는 것도 아니잖아. 난 남들이 어딜 가는지, 뭘 먹는지에는 관심 없어"라고 대답했다. 그 순간 새로운 여행의 문은 또 열렸다. 어떤 여행 정보도 없는 남편에겐, 아무것도 중요한 것이 없는 것이다. 목적지는 언제든지 변경가능한 것이다. 순간순간의 우리만 중요한 것이다. 그렇게 남편은 우리의 여행을 바꾸고 있었다. 서로가 서로의 여행을 바꾸고 있었다.





오래 기다려
천천히 먹는다.
서로 이야기하고 웃는다.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것은
맛있는 시간이다.

문득, 이렇게 살아야겠다 생각한다.
천천히.
음미하며.
같이.

여행이 아니더라도
순간순간을
천천히.
음미하며.
같이.

여행이 내게
일상의 리듬을 가르친다.





아직 물러가지 않은 어둠과 이제 막 당도한 빛이 어우러지는 풍경 앞에서 나는 어느 순간 소리 지르는 것도 멈췄다. 이 자연 앞에서는 경건해야 했다.






할아버지는 말한다.
오전에는 포토밭에서 일해.
농장이 얼마만 하냐면 팔만 헥타르야. 매우매우매우 커.
그리고 오후에는 나무을 깎아. 취미야.





때로는 여행을 떠나와
누군가의 일상이
묵묵히 이어지고 있다는 것을
목격하는 것만으로도
묵직한 위로가 될 때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은 계속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기어이 살아야 한다.






'모든 것을 처음이자 마지막인 것처럼
오랫동안 머뭇거리며 바라보'는 것

비행기 안에서 나는
한참이나 이 구절을 곱씹었다.






그 모든 젊음엔 박수가 필요하니까.
그 모든 용기엔 팬이 필요하니까.







그들은 시간이 많아 시간에 휘둘리지 않았다.
한 곳에 일주일 이상 머무르며 천천히 움직였다.
6개월의 여행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작은 가방을 들고.
"우리는 늙어서 빨리 못 움직여. 그러니까 천천히 여행하는 거야.
가방도 마찬가지야. 늙어서 무거운 걸 많이 들 수가 없어.
오래 여행하려면 가벼워져야 해."

그날 밤, 나는 여행 가방을 뒤져서 엽서 한 장을 꺼냈다.
그들처럼 늙고 싶다고. 그렇게 오래오래 사랑하는 사람과 여행하고 싶다고.
나의 꿈이 되어주어서 고맙다고. 끝까지 무사한 여행이 되길 빈다고 썼다.

다음 날, 그 엽서 한 장이 노부부를 울려버렸다.
새빨개진 눈으로 눈물을 닦으며 그들은 엽서를 가방에 넣었다.
"너를 보면, 너의 남자친구도 틀림없이 좋은 사람일 거야.
나중에 꼭 우리처럼 오래오래 여행을 떠날 수 있을 거야.
아마도 정말로 좋은 여행이 될 거야. 네가 좋은 사람이니까."

나에겐 평생 기억하고 싶은 칭찬이 있다.
평생을 노력해 현실로 만들고 싶은 꿈이 있다.







매일 더 부지런한 동네 여행자가 되자고 마음을 먹는다. 멀리 떠나는 것만이 여행은 아니니까. 멀리 여행을 떠나 비싼 수업료를 내고 배운 것은 결국 여행자의 마음가짐이니까. 그 마음가짐으로 내 고향을 여행해보자고 마음을 먹는다. 내 고향은 망원동이니까. 내가 내 고향의 가장 충실한 여행자가 되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의무인 것이다.






지금, 이곳에서,
모든 요일의 여행은
다시 시작이다.



2017년 9월 26일 모든 요일의 여행 - 김민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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