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

저자
김연수 지음
출판사
자음과모음 | 2012-08-27 출간
카테고리
소설
책소개
사람과 사람 사이의 심연을 건너가는 것!동인문학상, 황순원문학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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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06. 03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 너를 생각하는 것은 나의 일이었다.




왜 뒷부분을 마저 읊지 않나요? 안개에게 항구와 도시를 충분히 바라볼 시간을 줘야죠.




레드우드를 보니까 안개 생각이 났어요. 이렇게 키가 큰 나무들은 땅에서 물을 끌어올리는 게 꽤 힘들어요.

그래서 위쪽은 안개로 수분을 공급받지요. 레드우드는 안개를 먹고 자라요.




"지구가 오른쪽으로 도니까 그랬던 거 아닐까?" 유이치가 말했다. 나는 그런 건 생각조차 해본 일이 없었다.




질보다는 양이야. 모든 재능이 그렇듯이.




아직도 이불속에서 나오지 않는 유이치를 깨워 그런 것도 시가 될 수 있는지 묻고 싶었다.

물론 늘 좋은 게 좋은 유이치는 당연하다고 말하겠지만.




진실은 매력적인 추녀의 얼굴 같은 것이라 끔찍한 게 분명한데도 더 자세히 알고 싶은 욕망이 든다면,

그건 진실에 가까이 다가가고 있다는 증거다.




아무도 그에게 수심을 일러 준 일이 없기에 흰 나비는 도모지 바다가 무섭지 않다.




얼마나 많은 밤을 자고 나야 하늘은 푸르러지나

얼마나 많은 땀방울을 더해야 강은 바다에 이르나.




햇살이 기우는 강변에 앉아 강물의 하루를 데려가는 노을을 보았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얼마나 오랫동안 안고 있어야 밤과 낮은 하나가 되나




거기 검푸른 밤하늘에 눈썹만큼이나 가는 달과 함박눈처럼 커다란 별이 떠있었다.




네게서 연락이 끊어지고 나서, 그리고 더 이상 내게 연락하지 않은 뒤로,

내가 가장 견딜 수 없었던 것은 너의 부재나 침묵이 아니라

너에게 그런 위로의 말을, 너를 위로하는 행동을, 그렇다고 말하고 또 그렇지 않다고 말하고, 

쓰다듬고 어루만지고 껴안고 입 맞추는 그 모든 인간적인 위로들을 해줄 수 없다는, 바로 그 사실이었어.

마음속으로 누군가의 안녕을 비는 일 따위는 추모비 앞에 선 정치가들에게나 어울리지,

이별을 당한 남자에게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일이라는 걸 이제 알겠네.





지나가면, 우리는 조금 달라지겠지. 하지만 그 조금으로 우리는 서로에게 낯선 사람이 되겠지.





다카에서 지내면 하루에도 몇 번씩 티셔츠가 흠뻑 젖습니다.

그러다가 오후가 되어 비가 내릴 때면 노아의 방주가 생각날 만큼 퍼부어댑니다. 빗소리 때문에 대화가 불가능할 정도입니다.




불행이란 태양과도 같아서 구름이나 달에 잠시 가려지는 일은 있을망정 이들의 삶에서 완전히 없어지지는 않습니다.

거기 늘 태양이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때, 우리는 거기 늘 태양이 있다는 사실을 잊습니다.




자신의 불행을 온몸으로 껴안을 때, 그 불행은 사라질 것입니다.




우리들의 사랑 이야기, 혹은 줄여서 '우리사이'




미연이라는 그 여자 친구는 동물들, 그중에서도 고양이와는 거의 완벽하게 소통한다고 한다.

하지만 서울 출신인 그녀와 진남 출신인 그는 서로 말귀를 못 알아들어서 다툰 적이 많았다.




그제야 사투리 때문에 헤어지는 연인이란 세상에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죠.

날카로운 깨달음이 여기 폐와 위장 사이에 꾹 박혀 늑골을 쑤셔대는 것 같습니다.




바다에 들어가면 다들 수신호를 할 뿐, 말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말이 없으니까 서로 오해할 일도 없습니다. 저는 바다속이 좋습니다.




아름다움이란 솜씨의 문제이고, 솜씨는 어떻게 바라보느냐의 문제라는 걸.




하지만 그 중에서도 제가 제일 좋아하는 건 그뭄 가까울 무렵 물 밖으로 나올때입니다.

하늘에도 빛이 없으니까 그저 위를 향해서 올라가기만 하는데,

그러다가 갑자기 별들이 확 쏟아질듯 제 시선으로 들어올 때가 있는데, 그러면 물 밖으로 다 나온 것입니다.




별빛이 제 쪽으로 떨어지는 그 순간은 정말 아름다워요. 이런 세상에 살 수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자유 평등 평화 행복 가득한 곳 희망의 나라로




"바닷물하고 빗물하고 어디 같습니까?" 어이가 없다는 듯 지훈이 너를 돌아본다.

지훈의 거침없는 말들이 네 마음에 든다. 암시나 비유의 그늘은 전혀 보이지 않는, 백일하에 또렷하게 드러나는 언어이다.




섭섭하게, 그러나 아주 섭섭하지는 말고 좀 섭섭한 듯만 하게

이별이게, 그러나 아주 영 이별은 말고 어디 내생에서라도 다시 만나기로 하는 이별이게

연꽃 만나러 가는 바람 아니라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 ......

엊그제 만나고 가는 바람이 아니라 한두 철 전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




그 나비는 바다를 건너갈 모양이네요.




하지만 아빠가 지금도 모스 부호를 해독할 수 있는지 없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우리에게는 최선을 다하는 일이 중요했다.


"짧게 네 번, 길게 세 번, 짧고 길고 길고 짧게, 짧게 한 번"

"이게 무슨 뜻이지"

"H.O.P.E."

"희망이네."




자정이 한참 지난 시간이었다. 그러자 불현듯 이제 내가 서른 살이 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는 소문 같은 건 하나도 안 무서워요.

사람들은 자기가 다른 사람의 마음을 다 들여다본다고 생각하지만, 그럴 때조차도 자기 마음 하나 제대로 모르는 바보들이니까요.

저는 자기 마음도 모르는 사람들이 하는 말들은 하나도 무섭지 않아요.

그 무지한 마음이 무서울 뿐이죠.




기다림이 하나의 계절이 되었다. 그대 굽은 팔꿈치를 닮은 어린 달이 마른 감나무 가지에 걸리는 동안.




착한 사람들 모두 잠자기 좋은 저녁 공기다 눈물도 가깝지 않고 이별도 멀리 있으니 세세토록 이나라에서 평안하리라.




그대 웃음을 닮은 하얀 새벽으로 쏟아진다.




안개가 만든, 안개를 닮은, 안개의 너와 나.




매서운 폭풍에도 굴하지 않고 그 작은 새는 수많은 이들을 따뜻하게 지켜주리니.




나는 어린 엄마를 꽉 안았어요.




밤이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가! 인간은 잊을 수 있어서




우리 시대에는 고독이 외롭다




첫사랑은 잊히지 않는다는 사실을. 우리가 두번째 사랑을 하지 않는다면.




휴대폰이나 대형 마트나 DMB 따위를 없앤다면 뭐가 남을 것 같아?

책 같은 게 있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그게 아니야.

원래 그 자리는 고독의 자리였어. 혼자 존재하는 자리.


지금은 디지털 기기에 밀려 일상에서 고독이 사라지면서 고독의 의미가 완전히 달라졌어.

21세기에 우리에게 허용된 고독의 공간이란 산티아고 순례길이나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 트래킹루트,

혹은 코티카나발루 고급 리조트의 모래사장 같은 곳이지.


요즘 세상에는 값싸게 즐길 수 있는 고독이란 게 없어.

돈을 지불하지 않은 고독은 사회 부적응의 표시일 뿐이지. 심지어는 범죄의 징후이기도 하고.




녹음 된 소리의 반은 바람 소리였다.




밤과 낮은 이토록 다른데 왜 이 둘을 묶어서 하루라고 말하는지.




서쪽으로 오렌지 빛 하늘이 잠기는 동시에 반대편에서 역청 빛 물결이 밀려드는 어스름의 풍경이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는 까닭은 그게 종말의 풍경을 닮았기 때문이라는 것을.

날마다 하나의 낮이 종말을 고한다. 밤은 그 뒤에도 살아 남은 사람들의 공간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서로에 대한 이해를 가로막는 심연이 존재합니다.

그 심연을 뛰어넘지 않고서는 타인의 본심에 가닿을 수가 없어요. 그래서 우리에게는 날개가 필요한 것이죠.


날개는 꿈과 같은 것입니다. 타인의 마음을 안다는 것 역시 그와 같아요.

꿈과 같은 일이라 네 마음을 안다고 말하는 것이야 하나도 어렵지 않지만,

결국에 우리가 다른 사람의 마음을 알 방법은 없습니다.


날개는 우리가 하늘을 날 수 있는 길은 없다는 사실을 알려주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입니다.

날개가 없다면, 하늘을 난다는 생각조차 못했을 테니까요.

하늘을 날 수 없다는 생각도 못했을 테지요.




너는 다른 사람의 마음을 다 알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니? 사람과 사람 사이를 건너갈 수 있니? 너한테는 날개가 있니?


나에게는 날개가 있어, 바로 이 아이야.




하지만 진실은 불편하지 않아요. 진실은 아름다워요.




난 최선을 다 할거야.




고통과 슬픔은 온전하게 그 심연을 건너오지 못했다. 심연을 건너와 우리에게 닿는 건 불편함뿐이었다.

우리는 그런 불편한 감정이 없어지기를 바랐다.

그때 우리는 고작 열여덟 살, 혹은 열아홉 살이었으니까. 우리는 저마다 최고의 인생을 꿈꾸고 있었으니까.




달팽이가 지나간 자리에 희미하게 진자리가 남듯이 어쩔 수 없는 울음이 지나간 뒤에는 부끄러움이 남았다.




아버지는 무서운 야심가야. 하지만 그런 아버지보다 더 무서운 건 사랑에 빠진 아버지야.

그건 사랑이 아니라 끔찍한 재앙 같은 것이었지.




왜 그럴 필요가 없는 사람들 까지도 사랑을 하는 것 일까?

그냥 수전노처럼 돈이나 벌면 행복에 겨울 사람들까지도 사랑을 해야만 하는 것일까?

아버지를 볼 때마다 나는 사랑이라는 건 전염병과 같다고 생각했어.

전염병이 사람을 가리지 않듯이 사랑도 모두에게 가능하니까.




아버지는 첫눈에 그 여자 후배에게 반했는데, 거기에는 사랑만 있을 뿐 사랑을 둘러싼 것들이 하나도 없었지.

태양만 있고 햇살은 없는 것처럼. 온기가 없는 불꽃처럼.




"여기 희망이 숨어 있네요."




희망은 날개 달린 것, 영혼에 둥지를 틀고 말이 없는 노래를 부른다네, 끝없이 이어지는 그 노래를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심연이 존재한다. 깊고 어둡고 서늘한 심연이다.

살아오면서 여러 번 그 심연 앞에서 주춤거렸다. 심연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서로에게 건너갈 수 없다."




희망은 날개 달린 것, 심연을 건너가는 것, 우리가 두 손을 맞잡거나 포옹하는 것,

혹은 당신이 내 소설을 읽는 것, 심연 속으로 떨어진 내 말들에 귀를 기울이는 것.

부디 내가 이 소설에서 쓰지 않은 이야기를 당신이 읽을 수 있기를.


o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