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에 해당하는 글들

  1. 2016.05.04  책: 한국 대표 단편 소설
  2. 2016.03.24  책: 정신과 영수증
  3. 2016.03.09  책: 혼자 사는 여자 - 백두리

그 날 예배는 아주 젬병이었디요. 웬일인지 예배가 다 끝날 때까지 어머니는 성이 나서 강대만 향하여 앞으로 바라보고 앉았고, 이전 모양으로 가끔 나를 내려다보고 웃은 일이 없었어요. 그리고 아저씨를 보려고 남자석을 바라다보아도 아저씨는 한 번도 바라다보아 주지도 않고 성이 나서 앉아 있고, 어머니는 나를 보지도 않고 공연히 꽉꽉 잡아당기시지요. 왜 모두들 그리 성이 났는지...... 나는 그만 으아 하고 한번 울고 싶었어요. 그러나 바로 멀지 않은 곳에 우리 유치원 선생님이 앉아 있는 고로 울고 싶은 것을 아주 억지로 참았답니다.




이튿날 유치원을 파하고 집으로 오게 된 때, 나는 갑자기 어제 벽장 속에 숨었다가 어머니를 몹시 울게 했던 생각이 나서 집으로 돌아가기가 어쩐지 부끄러워졌습니다. '오늘은 어머니를 좀 기쁘게 해 드려야 할 텐데...... 무엇을 갖다 드리문 기뻐할까?' 하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자 문득 유치원 안의 선생님 책상 위에 놓여 있던 꽃병 생각이 났습니다. 그 꽃병에는, 나는 이름도 모르나 곱고 빨간 꽃이 꽂히어 있었습니다. 그 꽃은 개나리도 아니고 진달래도 아니었습니다. 그런 꽃은 나도 잘 알고 또 그런 꽃은 벌써 피었다가 져 버린 후였습니다. 무슨 서양꽃이려니 하고 나는 생각하였습니다. 나는 우리 어머니가 꽃을 사랑하는 줄을 잘 압니다. 그래서 그 꽃을 갖다가 드리면 어머니가 몹시 기뻐하려니 하고 생각하였습니다.
사랑 손님과 어머니 - 주요섭





당나귀가 더 날뛰었다. 당나귀가 더 날뛸수록 아이의, 왜 쥑엔! 왜 쥑엔! 하는 지름 소리가 더 커 갔다.
그러다가 아이는 문득 골목 밖에서 누이의, 데런! 하는 부르짖음을 들은 거로 착각하면서, 일부러 당나귀 등에서 떨러져 굴렀다. 이번에는 어느 쪽 다리도 삐지 않았다. 그러나 아이의 눈에는 그제야 눈물이 괴었다.
어므 새 어두워지는 하늘에 별이 돋아났다가 눈물 괸 아이의 눈에 내려왔다. 아이는 지금 자기의 오른쪽 눈에 내려온 별이 돌아간 어머니라고 느끼면서, 그럼 왼쪽 눈에 내려온 별은 죽은 누이가 아니냐는 생각에 미치자 아무래도 누이는 어머니와 같은 아름다운 별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머리를 옆으로 저으며 눈을 감아 눈 속의 별을 내몰았다.
별 - 황순원






"너 집엔 이거 없지."
하고 생색 있는 큰소리를 하고는 제가 준 것을 남이 알면 큰일날 테니 여기서 얼른 먹어 버리란다. 그리고 또 하는 소리가,
"너 봄 감자가 맛있단다."
점순이와 나
동백꽃 - 김유정





아무리 잘 봐야 내 겨드랑 - 다른 사람보다 좀 크긴 하지만- 밑에서 넘을락말락 밤낮으로 요 모양이다. 개 돼지는 푹푹 크는데 왜 이리도 사람은 안 크는지 한동안 머리가 아프도록 궁리도 해 보았다. 아하, 물동이를 자꾸 이니까 뼈다귀가 움츠러드나 보다 하고 내가 넌지시 그 물을 대신 길어다 주었다. 뿐만 아니라 나무를 하러 가면 서낭당에 돌을 올려 놓고,
"점순이의 키 좀 크게 해 줍소서. 그러면 담엔 떡 갖다 놓고 고사드리지요." 하고 치성도 한두 번 드린 것이 아니다. 어떻게 돼먹은 킨지 이래도 막무가내니......


점순이는 뭐 그리 썩 예쁜 계집애는 못 된다. 그렇다고 또 개떡이냐 하면 그런 것도 아니고 꼭 내 아내가 돼야 할 만큼 그저 툽툼하게 생긴 얼굴이다. 나보다 십 년이 아래니까 올해 열여섯인데 몸은 남보다 두 살이나 덜 자랐다. 남은 잘도 훤칠히들 크건만 이건 위아래가 몽톡한 것이 내 눈에는 하릴없이 감참외 같다. 참외 중에는 감참외가 제일 맛 좋고 예쁘니까 말이다. 둥글고 커다란 눈은 서글서글하니 좋고 좀 지쳐 찢어졌지만 입은 밥술이나 톡톡히 먹음직하니 좋다. 아따, 밥만 많이 먹게 되면 팔자는 고만이 아니냐. 한데 한 가지 흠이 있다면 가끔 가다 몸이 - 장인님은 이걸 채신이 없이 들까분다고 하지만 - 너무 빨리빨리 논다. 그래서 밥을 나르다가 때없이 풀밭에다 깨박을 쳐서 흙투성이 밥을 곧잘 먹인다. 안 먹으면 무안해할까 봐서 이걸 씹고 앉았노라면 으적으적 소리만 나고 돌을 먹는 겐지 밥을 먹는 겐지......






"밤낮 일만 하다 말 텐가!"
하고 혼자 쫑알거린다. 그동안 잘 내외하다가 이게 무슨 소린가 하고 난 정신이 얼떨떨했다. 그러면서도 한편 좋은 수가 있는가 싶어서 나도 공중에 대고 혼자말로,
"그럼 어떡해?"
하니까,
"성례시켜 달라지 뭘 어떡해."
하고 야무지게 쏘아붙이고 얼굴이 발개져서 산으로 그저 도망질을 친다.





사실 이 때만큼 슬펐던 일이 또 있었는지 모른다. 다른 사람은 암만 못생겼다 해도 괜찮지만 내 아내 될 점순이가 병신으로 본다면 참 신세는 따분하다.
봄봄 - 김유정








진수가 돌아오는데 고등어나 한 손 사 가지고 가야 될 거 아닌가 싶어서였다. 장날은 아니었으나, 고깃전에는 없는 고기가 없었다. 이것을 살까 하년 저것이 좋아 보이고, 그것을 사러 가면 또 그 옆의 것이 먹음직해 보이는 것이었다. 한참 이리저리 서성거리다가 결국은 고등어 한 손이었다. 그것을 달랑달랑 들고 정거장을 향해 가는데, 겨드랑 밑이 간질간질해 왔다. 그러나 한 쪽밖에 없는 손에 고등어를 들었으니 참 딱했다. 어깻쭉지를 연신 위아래로 움직거리는 수밖에 없었다.


진수는 하는 수 없이 둑에 퍼지고 앉아서 바짓가랑이를 걷어올리기 시작했다. 만도는 잠시 멀뚱히 서서 아들의 하는 양을 내려다보고 있다가,
"진수야, 그만두고 자아, 업자."
하는 것이었다.
"업고 건너면 일이 다 되는 거 아니가. 자아, 이거 받아라."
고등어 묶음을 진수 앞으로 만다.
"......"
진수는 퍽 난처해하면서 못 이기는 듯이 그것을 받아들었다. 만도는 등어라를 아들 앞에 갖다 대고 하나밖에 없는 팔을 뒤로 버쩍 내밀며,
"자아, 어서!"
진수는 지팡이와 고등어를 각각 한 손에 쥐고, 아버지의 등어리로 가서 슬그머니 업혔다. 만도는 팔뚝을 뒤로 돌려서 아들의 하나뿐인 다리를 꼭 안았다. 그리고,
"팔로 내 목을 감아야 될 끼다."
했다.
수난이대 - 하근찬





"선생님, 노래를 불러 주세요. 마지막 소원...... 노래를 해 주세요.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여는 머리를 끄덕이고 눈을 감았다. 그리고 입을 열렀다. 여의 입에서는 창가가 흘러 나왔다.
여는 고즈넉이 불렀다.
"동해물과 백두산이......"
고즈넉이 부르는 여의 창가 소리에 뒤에 둘러섰던 다른 사람의 입에서도 숭엄한 코러스는 울리어 나왔다.

무궁화 삼천리
화려 강산-.

광막한 겨울의 만주벌 한편 구석에서는 밥버러지 익호의 죽음을 조상하는 숭엄한 노래가 차차 크게 엄숙하게 울리었다. 그 가툰데 익호의 몸은 점점 식어 갔다.

붉은 산 - 김동인




160504


그래 맞아
나도 초등학교 때 그 애와 절대 짝이 되기 싫었지
맨날 짝 바꿔 달라고 울었었지

그런데 졸업식 날 알게 된 건데
그 애가 나를 좋아했었대

쓰레기 봉투를 사와서 두 봉투에
이것과 저것을 나눠 담으면서

이것이 저것을 좋아하는지
저것이 이것을 좋아하는지

혹시
이미 사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수사 중이다

2001년 5월 21일 오후 8시 02분
강남 가정용 쓰레기 봉투
2800원
세븐일레븐






나와 내 친구를
새로 이사간 집에 초대하고
내가 일했던 가게에
초밥을 사다 준 일
힘든 세상 꿋꿋이 견뎌내라고 거친 글씨로 적어준 편지
차에서 들었던
MY FUNNY VALENTINE 이 노래
지금은 무슨 말인지 다 알겠는데

그땐 스무 살이어서

예전에 오빠가 좋아했던 여자 이야기
모두 다 못 알아 들었지







"엄마 나 왔어!"
하고 들어가니

가스레인지 위에서 식어가는 보리차가 말을 해주는데
엄마는 가까운 친구 집에 마실을 가신 것이라고
곧 돌아오실 거라고 한다
아마 멀리 가실 거였으면
플라스틱 주전자에 나를 따르고 냉장고에 넣어두고 가셨을 거라고






낙지덮밥의 아래층에 사는 것처럼
맵고 뜨거운 날씨야






혼자 살 때보다
지아랑 살면서 좋은 점은
밥을 먹을 때
젓가락으로
두 장 짚게 된 깻잎의

아랫잎을 붙잡아 준다는 것이다

나를 붙잡아 주는 지아와 함께







"오빠
오빠의 집에 다녀오니까
매일매일
오빠의 집에 가고 싶어요
그래서 하얀 우유가 되어 매일 아침 오빠의 집에 가려고요
아침에 일어나서 문 밖의 나를 집으로 데리고 가요"

"하하하 그래 좋아 고마워"

그 때
그렇게 매일 아침
하얀 서울우유를 배달 보냈지
그러다가 발렌타인데이 날에는 초코유유를 보내려고 생각했었어

그렇지만 그 오빠
이젠 어디에 사는 지도
우유빛 만큼 뿌옇지

오빠였었는대
왜 결혼해서 아저씨가 되었어
미워미워
미워

2001년 10월 21일 오후 1시 53분
서울우유 500ml
850원
세븐일레븐







1999년 나의 친구 사이다가
스물 두 살이었을 때
스물 한 살부터 모은 돈으로 니콘 FM2를 사고

충무로 던킨 도너츠 창가에 앉아서
나에게 묻는다

"정신, 나 잘 할 수 있을까?"

"그럼 잘 할 수 있지 걱정마"
그렇게
이렇게
스물 넷이 될 때까지
계속 할 수 있을 것을
미리 알고 있었던 가게 안의 도너츠 들은
다들

동그라미

글쎄어고 하는 세모난 것들은 팔려나가고 없었지

2001년 오늘 던킨 도너츠에 들러
시나몬과 바바리안 초코하니딥을 고르면서
며칠 후 수능시험을 준비하는 고3 수험생 같기만 한 여자아이 둘이서
창가에 시무룩하게 앉은 것을 보고
나는 저쪽에 두개 남은 세모난 것들을 모두 선더

5분 후

창가의 여자아이들이
환히 웃으면서
동그란 도너츠를 먹고 커피를 마신다

이들도 우리처럼 잘 할 수 있을 것이다

2001년 11월 9일 오후 4시 13분
도너츠와 휀시류
3800원
던킨 도너츠






강가엔
고전 건축물들이 주루룩 서 있다

건강하게 세월을 참아내어
이 건축물로부터 멀기만 한 나라와
멀기만 한 시대에서 온 나를 반겨주며

지난 역사를 모두 믿게 한다

2001년 12월 6일 오후 5시 19분
바게트
5.95F
S.O.G.E.S.T







맞아맞아

나는 학교다닐 때
탈색한 아이들의 머리카락과
그 머리카락을 신경질적으로 휘저어 대던
가정 선생님의 자주색 손톱이
서로를 이해할 수 있으면 좋을텐데 생각했어

우리 모두
색깔에 관심이 있어서 그러는 건데 하면서 말이야








'오늘은 이 만큼까지만 먹자
이거 다 먹으면 뚱땡이 코끼리 다리 되니까
나머지는 내일 아침에 먹자' 하고

의자를 딛고 올라가 높은 선반 위에 이 만큼 남은 빵을 올려 둔다

그렇지만
소용없는 일
샤워를 하고
의자를 딛고 올라가
높은 선반 위에 이 만큼 남은 빵을 내려 온다

하하하 이럴 거였으면
그냥 식탁 위에 놓아 둘 걸
뭐하러 의자를 딛고 올라가 그 높은 곳에 두었을까

오늘 아침에도 우리는 새상에서 제일 맛있는 빵을 한 봉지 산다
두 봉지 사고 싶은 마음을 슈퍼마켓 선반 위에 올려 두고서

2001년 12월 11일 오후 6시 28분
BRIOCHE TRAN
10.63F
GEANT PARIS MASSENA







저녁에 난로 불을 끄고 집에 갈 때엔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제 시험이 얼마 안 남았으니
느그들 괜히 새 문제집 사 들이지 말고
있는 거 다 풀고 다 푼 사란들은
또 보기라
공부 못하는 아이들이 새 문제집 사는 기라"

인천 공항에 도착하여
비행기 밖으로 나가는 길에

나는 선생님의 말씀을 다시 떠올리며

프삭프삭 웃으며

나의 친구, 나의 일, 사랑 그리고 어려운 문제들
다시 잘 보고 풀어내야지
새로 살 것 없어





생겨난 그대로 살아가기를 바랍니다.
생겨나게 해주신 하느님 감사합니다.




나는 정신을 2004년에 처음 만났다. 민선 언니의 소개로 나간 자리였다.
난생 처음보는 종류의 한 작은 애가 시작부터 영롱한 무엇이었다. 완전히 달랐다.

아홉 살에도 열네 살에도 스물셋에도 내가 찾던 사람.
그 나이엔 어디에 살았느냐고 처음 만난 자리에서 실제로 그런 질문을 막 해댔었다.
글리세린을 섞은 듯 쉽게 증발하지 않는 정신의 이야기들은
뒤틀어져 엉거주춤 힘겨운 숨을 내쉬던 나를 촉촉히 펴주었다.

그날부터 오늘까지 십이 년이 흘렀다. 서수남 하청일같이 사이좋게 쏘다녔다.
이제 나는 정말 더 찾지 않는다.
어떤 해는 정신을 한 번도 못 보고 지나가도
정신을 모르던 시덥잖은 날들에 비하면 아름답다.

정신과 영수증의 재출간을 축하하며

방송인 / 홍진경






20160324 정신과 영수증 - 글 정신 사진 사이이다 디자인 공민선



감기 바이러스는 귀신과 같아서
내 기를 쪽쪽 빨아먹고 혼도 쏙 빼 놓고,
너덜너덜한 거적때기만 남을 때쯤 옆 사람에게 건너가고
또 다른 사람에게 달라붙기를 반복한다.

내가 감기를 이겨 냈다기보다
감기가 나에게 더 이상 별 볼 일 없어져 떠나는 모양새.






누군가 옆에 있어도 외롭다고 하는 말은
진짜 고독이 무엇인지 맛보지 못한 사람들의 투정일지도 모른다.

애피타이저를 맛본 후에 더 커진 식욕일 뿐
아무것도 먹지 못한 사람의 허기와는 비교할 수 없다.





공유와 소유 사이

혼자 떠난 여행에서 엄청난 비경을 발견했을 때
옆에 누군가가 있어서 이 감정을 함께 공유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다가도
이 아름다운 광경이 온전히 내 것이 된 것만 같은 느낌에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고 그 자리에 영영 혼자였으면 싶기도 하다.





극과 극의 마음

혼자 지내는 게 편하고 익숙해서
과연 내가 누군가와 함께 살 수 있을지,
다른 사람과 사생활을 공유하고
공간을 나눠 쓸 수 있을지 걱정되다가도

막상 사무치는 외로움에 다른 이와 손 꼭 잡고 잠들고 싶고,
티격태격하며 TV 채널 다툼도 하고 싶고,
마주 앉아 늦은 아침밥을 먹고 싶기도 하다.

혼자 산다는 것은
'이대로가 좋다'와 '소통하고 싶다'라는
극과 극을 오가는 것.




중력의 위력

하루가 다르게
바닥을 향해
흘러내리는 모공들.





심심했던 거지
혼자 있으면 자연스레 생각이 많아지고
온갖 고민과 잡생각이 몰려온다.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져
어차피 해결할 수도 없는 고민들부터
남 걱정, 세계정세 걱정, 우주와 풀리지 않은 미스터리들에 관한 생각까지.
오만 가지 생각들이 얽히고설킨다.

그 생각즐을 좇다 보면 마치 내가 철학자라도 된 듯한 착각에 빠지고
내 이름으로 된 이론 하나로 세상을 뒤엎을 수도 있을 것만 같다.

그러다,
'우리 놀까? 답답해서 홍대 가서 놀고 싶은데'

친구의 문자 한 통에
그 많은 진지한 생각들은 다 어디 가고
그저 놀 생각에 신이 나는 거 있지






꼭꼭 숨어라

나이가 무기인 시절이 있다.
삐치고 투정 부려도 다 받아 주고 귀여운 받는 시절.
누군가 어르고 달래 주던 시절.

그런데 어느덧 사람들은 나에게
이해심과 배려심, 관용과 우아함을 요구한다.
그게 나이에 따라 갖춰야 하는 미덕이라고.

나는 여전히 삐치고 토라지기 일쑤다.
나이가 들었다고 마음이 한없이 넓어지는 건 아니더라.
감정을 숨기고 감추는 데 익숙해졌을 뿐.







'서른' 속에는 '어른'이 들어 있어서
어려운 건가 봐.






내일의 내 모습은
타로, 사주, 별자리가 알려 주는 운세보다
어떤 용한 점쟁이보다
어제와 오늘의 내가 더 정확히 말해 준다.





취향이나 성향은 수시로 바뀐다는 것을 알게 된 뒤로는
뭐든 쉽게 단정 짓지 않는다.
경험이 쌓알수록 그때그때 느껴지는 감정의 폭도 달라지고,
다양한 기억들이 뒤엉킨다.
예정에는 쉽게 넘어갈 수 있었던 점들이 지금은 거슬리기도 하고,
참을 수 없을 만큼 분노했던 것들을 아무렇지 않게 웃어넘기는 일도 생긴다.

'죽을 때까지' 이것은 먹지 않을 거야.
'다시는' 그 사람을 보지 않을 거야.
'절대' 그곳에 가지 않을 거야.
'영원히' 그 사람만 사랑할 거야.

남 앞에서 장담하고 약속했던 것들 중
지금까지 지키고 있는 것이 과연 몇 개나 될까.
그러나 단순히 마음이 변했다고는 할 수 없다.
그 순간의 나와 지금의 나는 경험한 것이 다르니
그때의 감정과 지금의 감정이 다른 것은 당연하다.
이제 누군가 나의 취향을 물어보면 앞에 한 단어를 붙여 대답한다.

'지금은' 무엇이 좋아요.
'요즘은' 무엇이 싫어요.

자꾸 마음이 변하는 나에게 실망하기보다는
그날그날의 감정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내일은 완전히 다른 취향의 내가 있을지 모르니까.






올지 안 올지도 모르는 미래를 위해
오늘 하루를 어제를 그저께를 희생했다면
언젠가 뒤돌아봤을 때 내 삶은 희생으로만 가득 차 있지 않을까?





여행지란 장소가 아니라 사물을 바라보는 새로운 방식이다. - 헨리 밀러





예전에는 맑은 날만 좋아했다.
잔디밭에서 광합성을 할 수 있고
한강 둔치로 소풍 갈 수 있는
햇볕 쨍쨍한 날.

요즘에는 비 오는 날도 좋더라.
비가 오면
슬픈 영화도 보고 싶고
드라이브도 나가도 싶고
동동주에 해물파전도 생각나고.

큰일이다.
이젠 햇볕 쨍쨍한 날도, 비 오는 날도
모두 놀고 싶으니
대체 일은 언제 하지.





아무리 피곤해도
설령 과음을 했더라도
자기 전엔 꼭 책을 읽는다.

늘 같은 일과가 반복되는 일상에서
잠들기 전 매일 다른 페이지를 읽음으로써
오늘은 어제와 다른 마무리를 지을 수 있다.

반복적인 습관이
오히려 되풀이되는 일상에 변화를 주는
특별한 통로가 죄기도 하더라.




부모님의 간섭 없는 자유로운 생활을 만끽하다가도
정작 힘들 때는 엄마 밥이 그립고
엄마 품에서 잠들고 싶을 때가 있다.
몸이 정말 아프다거나 하루가 너무 고됐다거나.

신나게 놀 때는 고향 생각 한번 안 하다가
힘들 때만 찾는 아직 애 같은 내 모습이 싫어서
엄마 목소리 듣고 싶은 걸 꾹 참고 있다 보면,
어떻게 알고 엄마는 그 시간에 전화를 걸어
나를 울리곤 하는 걸까?

엄마 보고 싶다.




맹랑한 꼬마다.
해외여행에서 우연히 만난 한국 아이가
말도 잘하고 귀여워서 예쁘다 예쁘다 해 줬더니,
이 조그만 것이 아직 손주도 없는 우리 엄마에게
할머니 같다며 "할머니, 할머니" 불러 대는 거다.

나쁜 의도가 있는 게 아닌 어린아이가 하는 행동인데도
속에서 열불이 끓어올랐다.
'이 자식이 진짜! 너 이렇게 젊고 날씬하고 예쁜 할머니 봤어?
너네 엄마도 펑퍼진 아줌마고만!'
속에서 부글거리며 올라오는 말을 눌러 대다가
나도 모르게 여섯 살짜리 아이에게 소리를 질렀다.
"야! 할머니 아니야! 아니거든! 아니라고!"

엄마를 볼 때면
여전히 내가 열 살쯤에 봤던 엄마 얼굴로 보인다.
30대의 엄마 얼굴.
나는 엄마가 학교에 오는 게 좋았다.
엄마는 멀리서부터 눈에 띄었다.
모든 엄마 중에 우리 엄마가 제일 예쁘고 날씬했다.
친구들 모두 우리 엄마를 부러워했었다.
나한테는 지금도 여전히 세상에서 제일 예쁜 엄마다.

그 꼬맹이에게 꿀밤이라도 먹여 줬어야 하는 건데.
20년쯤 지나면 너도 이 아줌마를 이해할 수 있을 거야.





초등학교 때, 일하는 엄마 대신
외할머니가 종종 나를 돌봐주셨다.
친조부모, 외조부가 안 계신 나에게 유일한 할머니.
친구 같았던 할머니에게
잘난척쟁이인 나는 잔소리를 늘어놓곤 했다.

어느 날은 할머니가 린스를 샴푸로 착각하곤
거품이 안 난다며 계속 많은 양을 사용하시는 거다.
나는 샴푸랑 린스도 구분 못 하냐고 할머니에게 타박을 줬다.
지금 생각하면 쪼끄만 게 버릇도 없었지.
그때는 정말 미안했다고, 샴푸 한 트럭 사드리겜ㅅ더고,
할머니 사랑한다고 말하고 싶은데
할머니는 내게 기회도 안 주고
내가 열 살 때 너무 빨리 떠나 버리셨다.
할머니와 즐겁고 행복했던 적이 훨씬 많을 텐데,
나는 할머니만 생각하면 이 일밖에 기억이 안 난다.

다른 사람들과도 그렇게 되는 거 아닐까.
좋은 추억도 많을 텐데 고맙다, 미안하다는 말을 못 했던 기억에
힘들어지진 않을까.
할머니 때처럼 후회만 남지는 않을까.
나는 매우 이기적이라,
더 이상 나를 더 아프게 하지 않으려고 한다.

그래서 순간순간 표현하며 살려고.








힘들었던 마감을 끝내고 나면 친구들과 수다를 떨 수도, 밤새 술 마시며 놀 수도, 멀리 여행을 갈 수도 있지만, 이따금 익산 고향 집에 내려간다. 서울 토박이들은 묻곤 한다. 방해하는 사람이 앖으니 서울 집에서도 편하게 휴식을 취할 수 있지 않느냐고.

살고 있는 집에서의 휴식과 살았던 집에서의 휴식은 전혀 다르다. 엄마가 해 주는 따뜻한 밥이 있어서, 인구 밀도가 낮은 조용한 도시라서, 서울 집에 비해 좋고 넓은 집이라서 다른 게 아니다. 그곳은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돌아간 듯 내가 떠나온 열아홉 살 시절로 돌아간 기분을 느끼게 해 준다.

서울에서 보낸 11년의 시간을 통채로 들어내고 과거로 돌아간 느낌.

그곳에는 지난 11년간의 복잡하고 험난한 어른으로서의 기억과 흔적이 묻어 있지 않다. 순수했던 어린 시절과 가족에 대한 기억으로만 채워져 있다. 그동안 살아온 시간은 잠시 멈추고 마지막 방문했을 때의 감정을 이어 가게 된다. 어른인 척하느라 지친 몸과 마음을 되돌리는 시간이다.

그곳에서는 시간을 재는 방식도 다르다. 실제로는 1년이 지났어도 내가 그곳에서 보낸 날은 명절과 부모님 생신, 휴식을 위해 보내는 며칠을 합하면 1년에 20일 남짓이다. 서울 생활을 하며 11년을 보내고 서른한 살이 되는 동안, 그곳에서는 겨우 220일 정도 지났으니 여전히 열아홉 살이다.

어릴 때 쓰던 일기장, 못난이 시절의 사진이 그대로 남아 있는 그곳에서 어린 시절로 돌아가는 건 너무나 쉽다. 현관문을 들어선 순간 시간여행은 시작된다. 나는 이 타임머신을 되도록 오래 간직하고 싶다.



때로는 어떤 사람에 대해
오랫동안 옆에서 지켜본 사람보다
처음 본 사람이 더 잘 파악하기도 한다.

첫 만남에서는 보통
자신과 같은 부류인지 다른 부류인지 알아내기 위해
작은 단서도 집둥해서 관찰하곤 한다.
그런 뒤에 '우리는 서로 다른 것 같다'고 생각되면
관계는 더 나아가지 않는다.

가족이나 연인처럼
가까이에서 언제나 옆에 머물렀던 사람들은
관계를 지속하기 위해 서로가 다르다는 점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러면서 서로의 다른 생각이나 표현 방식에 서운해하기도 한다.

인식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차이의 '익숙함'을 '동질감'이라고
착각하기도 한다는 걸.







사랑은 한쪽으로 치우쳐도
더 큰 쪽이 이끌어 주면 어떻게든 앞으로 나아가기도 하고,
짝사랑이란 이름으로 버티기도 한다.

반면 우정이라는 감정은 공평해서
마치 계약관계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한쪽이 소홀하면 다른 한쪽도 같이 감정이 식곤 한다.

쌍방 간에 적절하게 균형을 유지해야 하기에
어찌 보면 연인보다도 더 아슬아슬한 관계다.

그래서
사랑에 버림받아도 더 큰 다른 사랑이 채워지면
불균형했던 마음이 안정을 찾기도 하지만,
우정은 한번 배신당하면
다른 친구로 쉽게 채워지지 않는다.







인연날리기

처음에는 전속력으로 뛰어야 해.
바람에 타고 오를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서.

그 후에는 바람에 휘날리는 연을 감상하면서 뿌듯하고 벅찬 마음이 들지.
그런데 그 기쁨을 누리고 있을 때쯤
나무에 걸리지는 않을까, 다른 연과 뒤엉키지는 않을까
조바심이 나고 불안하기도 해.
떨어질 것만 같은 불안감이 커져서
그 전에 더 높이 더 멀리 날려야겠다는 욕심이 드는데,

그 순간 실이 다 풀어져 영영 날아가 버리곤 하더라.





왜 자꾸 연애할 때와 연애 안 할 때로만 구분 지으려 하는 걸까?
난 누군가와 함께일 때도, 혼자일 때도
언제나 빛나고 있는데.




160309 혼자 사는 여자 - 백두리








작가님이 너무 나같아서 놀랐다. 달팽이를 싫어하는 것만 빼고 다.

특히 엄마나 할머니 또는 집에 대한 생각들이


oc